- L선생님께
전태흥 작가는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김범일 대구시장 대변인과 조해녕 대구시장 대변인,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교통전문업체인 ㈜미래티엔씨 대표를 역임하고 현재 고향인 부산에서 도서관을 운영중입니다.
저서로는 ‘사람의 숲에서 보내는 편지’, ‘슬픈 영혼 사람의 길을 묻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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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태흥 작가 | ||
이십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삼십대 이후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L선생님, 젊은 날 우리가 그토록 듣기 싫어하던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의 이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80년대 내내 세상의 변화를 꿈꾸던 우리에게 이 말은 기성세대들의 자기 합리화로와 비겁한 변명처럼 들렸지요.
우리는 아마도 그들이 한 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었다가 유물론에 회의를 품게 되어 탈당하여 자유주의를 옹호, 지지했던 칼 포퍼의 삶에 매력을 느꼈다고 생각했지요. 해서 어쩌면 그런 그의 삶을 보라고, 그가 한 말을 새겨들으라고 소리치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요 어쩌면 그들은 칼 포퍼야말로 세상의 변화를 꿈꾸던 젊은이들의 치기(?)를 막을 수 있는 롤 모델이라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순진한 믿음과는 별개로 당시 이 나라를 지배했던 정치권력은 칼 포퍼가 쓴 책,《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을 금서로 지정하였지요.
그 이유는 어리석게도 적들(enemies)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숨기고 감추고 싶었던 부정한 권력을 지녔던 정권은 책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적들이란 단어에 위협을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조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대학가의 베스트셀러로 만들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책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열린사회의 적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L선생님, 벌써 30여년이란 시간이 지난 일을 오늘 다시 이렇게 꺼내는 이유는 부끄럽게도 아직도 우리 사회가 통제와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8일,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도종환 시인의 시와 산문이 실린 8종의 중학교 검정교과서를 수정 보완하도록 출판사 쪽에 권고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이유는 도시인이 국회의원(제19대 민주통합당 비례대표)이 되어 특정 정치인의 이미지를 미화 시킬 수 있고 그 때문에 '교육의 중립성 유지'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어 수정 보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쉽게 납득하거나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더구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권고 수준의 수정ㆍ보완 의견이라며 정치적 해석을 말아 달라는 평가원의 사족이 오히려 더 정치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과서 승인에 대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정ㆍ보완 의견에 이의를 제기할 출판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L선생님, 한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그 시인의 시가 갑자기 정치색을 띈다고 보는 편향된 시각, 이것이 이 나라 교육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행정부서의 시각이라면 우리 교육의 미래가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평가원의 관계자들은 도 시인의 시를 단 한 줄만이라도 과연 읽어보기나 한 것일까요? 어쩌면 앞서 말한 30여 년 전, 칼 포퍼의 책이 금서가 된 이유처럼 단지 도 시인이 야당의 국회의원이기 때문이라는 문제 제기에 더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요?
한 때 우리 교과서에 친일파들의 시와 산문이 당당하게 실렸던 것을 다시 나무라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지금에 와서 교육 당국자들의 나태함과 무지를 탓할 이유는 추호도 없습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가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이 순간, 아직도 이 시대착오적인 편견과 정치적 논리가 우리 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것도 모자라 지배를 강고히 하려 들고 있는 현실이 너무도 절망스럽고 아픕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심의와 검열이 서서히 되살아나 우리의 내면을 잠식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과연 우려일까요? 얼마 전, 여성가족부가 대중가요의 가사에 “술”이나 “담배”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19금 판정을 내렸던 적이 있었지요.
문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술”과 “담배”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유해 매체가 된 사연을 청소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 할까요? 어쩌면 방통위나 여성가족부는 모든 음반에 소위 건전가요라는 것을 넣어 감시하던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학교 폭력이 만연하고 그 폭력 속에 우리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슬픈 현실 앞에 대안이 기껏 이런 것이라니 서글프기만 합니다. 단지 “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금서를 지정하던 30년 전의 시대와 오늘이 너무나 닮아 두렵습니다.
L선생님,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 1950)은 그의 소설 《1984년》에서 “모든 사람들이 당이 강요하는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또 모든 기록들이 같은 소리를 말한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었고 두려워 했던 것은 권력의 폭압과 그에 따른 대중의 무지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침묵입니다. 어쩌면 제 자신도 그 침묵의 세상에 동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미 깊이 빠져 들어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다시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살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칼 포퍼가 지적한 이성의 시간, 삼십대를 훌쩍 넘어 이미 오십 줄에 섰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 감성보다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이성만으로 해석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입니다. 당신에게 이 글을 쓰는 순간, 교육평가원은 시인의 시와 산문이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에 삭제 권고를 철회한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젊은 날, 사람에 대한 뜨거운 연민으로 가슴 앓았던 우리의 기억이 울컥 떠오르더군요. 아직도 유효하다면 서른이 넘어서도 이성이 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에 시인의 시를 떠올립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전문)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절망의 시간 속에 서 있는 외로운 아이들에게 따뜻한 시 한편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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